타르구타이 쿠릴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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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르구타이 쿠릴투크는 키야트 몽골의 암바가이 칸의 손자 혹은 다른 아들의 아들로, 몽골 부족의 지도자가 되려 했으나 칭기즈 칸(테무친)과의 갈등으로 몰락했다. 1171년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한 후 몽골족의 족장이 되려 했으나, 예수게이의 아들 테무친이 후계자가 되자 그를 쫓아내고 몽골족을 지배했다. 이후 테무친을 노예로 삼고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1201년 자무카와 연합하여 테무친과 대립하다 패배하여 행방불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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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구타이 쿠릴투크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칭호 | 쿠릴투크 |
씨족 | 키야트 씨족 |
출생 | 불명 |
사망 | 1206년 이후 |
활동 시기 | 12세기 |
가족 관계 | |
자녀 | 에부겐 |
기타 | |
역할 | 카마그 몽골의 지도자 |
2. 생애
1171년 타타르족의 메구진 세울투에게 예수게이가 독살당한 후, 몽올국은 해체되었고, 타르구타이는 몽골족의 족장이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후계자는 예수게이의 아들 테무친이었다. 그래서 타르구타이는 테무친을 쫓아내고 몽골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몽골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였으나, 몽골의 정식 지도자로 간주되지는 않았다.[2][3][4]
1176년 테무친이 이복형 벡테르를 활로 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타르구타이는 이를 빌미로 테무친 일가를 습격해 테무친을 잡아 노예로 삼았다. 테무친은 소르칸 시라와 그의 아들 침바이, 치라운의 도움으로 타르구타이에게서 벗어났다.[5]
1201년 테무친이 자무카와 대립하자 타르구타이는 메르키트족의 토크토아 베키와 함께 자무카 진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타이치우드족은 패배하였고, 타르구타이의 부하였던 제베는 테무친의 부하가 되었다. 타르구타이는 부하였던 시르구에투와 나야아에게 사로잡혀 습지로 쫓겨났다.[5]
1201년 테무진과의 전투에서 치라운이 던진 창에 허벅지를 맞고 중상을 입었다. 이후 타르구타이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테무친에게 사로잡혔다는 설도 있으나, 패한 직후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6][7]
2. 1. 가계와 초기 생애
키야트 몽골의 암바가이 칸의 손자로 아달칸(Адалхан)의 아들 혹은 암바가이 칸의 다른 아들 카다안 타이시의 아들이다. 또다른 설에 의하면 타르구타이는 암바가이 칸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몽골이 이란을 정복하고 세운 일 칸국의 사학자 라시드 웃딘은 페르시아어 사서 집사에서 그를 암바가이 칸의 아들 아달칸의 아들이라 한다. 쿠릴투크는 몽골어로 비만, 뚱보를 뜻한다.[1]"타르구타이 키릴투크"(《몽골비사》: Tarɤtai Qiriltuɤ, 《집사》: Tarqūtāī Qirīltūq)의 "타르구타이"는 "살찐(Tarɤn)"이라는 형용사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무라카미 마사오는 폴 펠리오의 견해에 따라 "타르구트족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유래라고 주장한다.[1]
2. 2. 몽골 부족의 지도자
키야트 몽골의 암바가이 칸의 손자로, 아달칸(Адалхан)의 아들 혹은 암바가이 칸의 다른 아들 카다안 타이시의 아들이다. 다른 설에 의하면 타르구타이는 암바가이 칸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몽골이 이란을 정복하고 세운 일 칸국의 사학자 라시드 웃딘은 페르시아어 사서 집사에서 그를 암바가이 칸의 아들 아달칸의 아들이라 한다. 쿠릴투크는 몽골어로 비만, 뚱보를 뜻한다.[2]1171년 타타르족의 메구진 세울투에게 예수게이가 독살당한 후, 몽올국은 해체되었고, 타르구타이는 몽골족의 족장이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후계자는 예수게이의 아들 테무친이었다. 그래서 타르구타이는 테무친을 쫓아내고 몽골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몽골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였으나, 몽골의 정식 지도자로 간주되지는 않는다.[3][4]
1176년 테무친이 이복형 벡테르를 활로 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테무친 일가를 습격해 테무친을 잡아 노예로 삼았다. 테무친이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자 타르구타이는 테무친을 죽이기 위해 쫓기 시작했다.
테무친은 소르칸 시라와 그의 아들 침바이와 치라운의 도움으로 타르구타이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1201년 힘을 키운 테무친이 자무카와 대립하자 타르구타이는 메르키트족의 토크토아 베키와 함께 자다란족의 자무카 진영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타이치우드족은 처참히 패배하였고, 타르구타이의 부하였던 제베는 테무친의 부하가 되었다. 타르구타이는 부하였던 시르구에투와 나야아에게 사로잡힌 뒤에 습지로 쫓겨났다.[5]
1201년 테무진과의 전투에서 사준사구의 1인인 치라운이 던진 창에 허벅지를 맞고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후 타르구타이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테무친에게 사로잡혀 바쳐졌다고는 하나, 테무친의 군사들에 의해 패한 직후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6]
『집사』에 따르면 타르구타이는 몽골 부족 제2대 칸이자 타이치우트 씨의 시조인 암바가이 칸의 아들 아달의 아들로, 당시 몽골 부족 내에서는 귀족 출신이었다. 몽골 부족에서는 제3대 칸인 쿠툴라 칸 이후 혼란이 이어져 칸이 배출되지 않는 시대가 계속되었는데, 그중 일시적으로 유력해진 것이 타르구타이의 족형이자 템진의 아버지인 예수게이 바아토르였으며, 타르구타이 등 타이치우트 씨 족인들도 예수게이와 행동을 함께 했다. 그러나 예수게이가 급사하자 타르구타이나 토도엔 기르테와 같은 타이치우트 씨 영수들은 즉시 예수게이 일족을 버리고, 더 나아가 예수게이의 백성 일부를 빼앗아 오논 강을 따라 떠나버렸다.
그 후, 남겨진 예수게이의 유아 템진이 성장했다는 것을 듣자 타르구타이는 "들꿩이 어린 깃털을 떨구었다. 침을 질질 흘리는 녀석이 어른이 되었구나"라고 말하며 템진 일족을 습격했다. 아직 어린 동생과 여동생을 둔 템진 일족은 타르구타이를 당해내지 못하고, 템진은 타이치우트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포로가 된 템진은 보름달이 뜬 밤에 탈출하여, 타이치우트 씨의 피지배민이었던 술두스 씨의 소르칸 시라에게 도움을 받아 타르구타이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이후 템진은 키야트 씨 중에서 지도자로 추대되어, 타르구타이에게는 몽골 부족의 주도권을 둘러싼 강력한 적으로 성장한다.[7]
『원조비사』에 따르면 타르구타이는 코이텐 전투에 타이치우트의 지휘관으로 참전했지만 칭기즈 칸에게 패배하여, 패주 중에 니추구트 바아린 씨의 아라크와 나야아 형제에게 포로로 잡혀 칭기즈 칸에게 끌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조비사』의 기록은 사실과 인과관계를 뒤바꾸고 있으며, 실제로는 타르구타이 등이 칭기즈 칸의 포로가 되는 사건은 코이텐 전투 전에 일어났으며, 코이텐 전투는 타이치우트부의 약화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원조비사』가 이처럼 사실을 개변하여 "코이텐 전투"에 대해 기술하는 것은, 편자가 템진에게 어린 시절부터의 숙적인 타이치우트 씨의 격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타이치우트 씨의 격멸"이 코이텐 전투의 주제라고 독자들이 인식하도록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후세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타르구타이 키릴투크는 칭기즈 칸의 강적 중 한 명으로 인식되었던 듯하며, 『신원사』 등의 편찬물에서 타르구타이 키릴투크는 자무카와 함께 열전으로 기록되어 있다.[8]
2. 3. 테무친과의 갈등
1171년 타타르족의 메구진 세울투에게 예수게이가 독살당한 후, 몽올국은 해체되었고, 타르구타이는 몽골족의 족장이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후계자는 예수게이의 아들 테무친이었다. 그래서 타르구타이는 테무친을 쫓아내고 몽골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몽골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였으나, 몽골의 정식 지도자로 간주되지는 않는다.1176년 테무친이 이복형 벡테르를 활로 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타르구타이는 이를 빌미로 테무친 일가를 습격해 테무친을 잡아 노예로 삼았다. 테무친이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자 타르구타이는 테무친을 죽이기 위해 그를 쫓았다.
테무친은 소르칸 시라와 그의 아들 침바이, 치라운의 도움으로 타르구타이에게서 벗어났다.[5] 1201년 힘을 키운 테무친이 자무카와 대립하자 타르구타이는 메르키트족의 토크토아 베키와 함께 자다란족의 자무카 진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타이치우드족은 처참히 패배하였고, 타르구타이의 부하였던 제베는 테무친의 부하가 되었다. 타르구타이는 부하였던 시르구에투와 나야아에게 사로잡힌 뒤에 습지로 쫓겨났다.
1201년 테무진과의 전투에서 사준사구의 1인인 치라운이 던진 창에 허벅지를 맞고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후 타르구타이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테무친에게 사로잡혀 바쳐졌다고는 하나, 테무친의 군사들에 의해 패한 직후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예수게이의 아들 테무친이 성장하자, 타르구타이는 "들꿩이 어린 깃털을 떨구었다. 침을 질질 흘리는 녀석이 어른이 되었구나"라고 말하며 테무친 일족을 습격했다. 어린 동생과 여동생을 둔 테무친 일족은 타르구타이를 당해내지 못하고 테무친은 타이치우트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테무친은 보름달이 뜬 밤에 탈출하여, 타이치우트 씨의 피지배민이었던 술두스 씨의 소르칸 시라에게 도움을 받아 타르구타이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다. 이후 테무친은 키야트 씨 중에서 지도자로 추대되어, 타르구타이에게는 몽골 부족의 주도권을 둘러싼 강력한 적으로 성장한다.[5]
그 후, 『원조비사』에 따르면 타르구타이는 코이텐 전투에 타이치우트의 지휘관으로 참전했지만 칭기즈 칸에게 패배하여, 패주 중에 니추구트 바아린 씨의 아라크와 나야아 형제에게 포로로 잡혀 칭기즈 칸에게 끌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조비사』의 기록은 사실과 인과관계를 뒤바꾸고 있으며, 실제로는 타르구타이 등이 칭기즈 칸의 포로가 되는 사건은 코이텐 전투 전에 일어났으며, 코이텐 전투는 타이치우트부의 약화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6]
2. 4. 몰락과 최후
1171년 타타르족의 메구진 세울투에게 예수게이가 독살당하면서 몽올국이 해체된 후, 타르구타이는 몽골족의 족장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후계자는 예수게이의 아들 테무친이었다. 타르구타이는 테무친을 쫓아내고 몽골족을 지배했으며, 몽골 지역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정식 지도자로 간주되지는 않았다.[2][3][4]1176년 테무친이 이복형 벡테르를 활로 쏴 죽인 사건을 빌미로, 타르구타이는 테무친 일가를 습격해 테무친을 잡아 노예로 만들었다. 테무친이 도망치자 타르구타이는 그를 죽이려고 추격했다.
테무친은 소르칸 시라와 그의 아들 침바이, 치라운의 도움으로 타르구타이에게서 벗어났다. 1201년 테무친이 자무카와 대립하자 타르구타이는 메르키트족의 토크토아 베키와 함께 자다란족의 자무카 진영에 합류했다. 그러나 타이치우드족은 패배했고, 타르구타이의 부하였던 제베는 테무친의 부하가 되었다. 타르구타이는 부하였던 시르구에투와 나야아에게 사로잡혀 습지로 쫓겨났다.[5]
1201년 테무진과의 전투에서 사준사구 중 한 명인 치라운이 던진 창에 허벅지를 맞고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후 타르구타이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테무친에게 사로잡혔다고도 하나, 테무친 군대에 패한 직후 죽었다는 설도 있다.[6][7]
3. 칭기즈 칸과의 관계
키야트 몽골의 암바가이 칸의 손자로, 아달칸의 아들이거나 카다안 타이시의 아들이다. 라시드 웃딘은 집사에서 타르구타이를 암바가이 칸의 아들 아달칸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쿠릴투크는 몽골어로 뚱뚱하다는 뜻이다.[2]
1171년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의 메구진 세울투에게 독살당한 후, 타르구타이는 테무친을 쫓아내고 몽골족을 지배했으나, 몽골의 정식 지도자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1176년 테무친이 이복형 벡테르를 활로 쏴 죽이자, 타르구타이는 이를 빌미로 테무친 일가를 습격해 테무친을 노예로 삼았다. 테무친이 도망치자 타르구타이는 그를 쫓았다. 테무친은 소르칸 시라와 그의 아들 침바이와 치라운의 도움으로 타르구타이에게서 벗어났다.[5]
1201년 테무친이 자무카와 대립하자 타르구타이는 메르키트족의 토크토아 베키와 함께 자무카 진영에 합류했다. 그러나 타이치우드족은 패배했고, 타르구타이의 부하였던 제베는 테무친의 부하가 되었다. 타르구타이는 부하였던 시르구에투와 나야아에게 사로잡혀 습지로 쫓겨났다. 같은 해 테무진과의 전투에서 치라운이 던진 창에 허벅지를 맞고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후 타르구타이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테무친에게 사로잡혔다고도 하나, 패배 직후 죽었다는 설도 있다.
『집사』에 따르면, 타르구타이는 몽골 부족 제2대 칸 암바가이 칸의 아들 아달의 아들로, 당시 몽골 부족 내에서 귀족 출신이었다. 몽골 부족에서는 제3대 칸 쿠툴라 칸 이후 혼란이 계속되어 칸이 배출되지 않았는데, 그중 일시적으로 유력해진 것이 타르구타이의 족형이자 템진의 아버지 예수게이였다. 타르구타이 등 타이치우트 씨 족인들도 예수게이와 함께 했다. 그러나 예수게이가 급사하자 타르구타이나 토도엔 기르테와 같은 타이치우트 씨의 영수들은 즉시 예수게이의 일족을 버리고, 예수게이의 백성 일부를 빼앗아 오논 강을 따라 떠나버렸다.[3][4]
템진이 성장하자 타르구타이는 "들꿩이 어린 깃털을 떨구었다. 침을 질질 흘리는 녀석이 어른이 되었구나"라고 말하며 템진의 일족을 습격했다. 템진은 타르구타이를 당해내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으나, 보름달이 뜬 밤에 탈출하여 술두스 씨의 솔칸 시라에게 도움을 받아 도망칠 수 있었다. 이후 템진은 키야트 씨 중에서 지도자로 추대되어, 타르구타이에게는 몽골 부족의 주도권을 둘러싼 강력한 적으로 성장했다.[5]
『원조비사』에 따르면, 타르구타이는 코이텐 전투에 타이치우트의 지휘관으로 참전했지만 칭기즈 칸에게 패배하여, 패주 중에 니추구트 바아린 씨의 아라크와 나야아 형제에게 포로로 잡혀 칭기즈 칸에게 끌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조비사』의 기록은 사실과 인과관계를 뒤바꾸고 있으며, 실제로는 타르구타이 등이 칭기즈 칸의 포로가 되는 사건은 코이텐 전투 이전에 일어났으며, 코이텐 전투는 타이치우트부의 약화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6] 『원조비사』가 이처럼 사실을 바꾸어 "코이텐 전투"에 대해 기술하는 것은, 편자가 템진에게 어린 시절부터의 숙적인 타이치우트 씨의 격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타이치우트 씨의 격멸"이 코이텐 전투의 주제라고 독자들이 인식하도록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7]
4. 가계도
참조
[1]
서적
村上 1970
[2]
서적
聖武親征録
[3]
서적
聖武親征録
[4]
서적
村上1970
[5]
서적
村上1970
[6]
서적
聖武親征録
[7]
서적
吉田2019
[8]
서적
新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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